하루키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Haruki Murakami)
※ 제목은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What I talk about when I talke about running)>를 모방한 것입니다.
1. 들어가며
아아, 기즈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너와 달리, 살려고 결심했고, 그것도 내 나름대로 올바르게 살겠다고 마음먹었었어. 너도 틀림없이 괴로웠겠지만 나 역시 괴롭다, 정말이야. 이렇게 된 것도 네가 나오코를 남겨 놓고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녀를 절대로 버리지는 않을 생각이야. 나는 그녀가 좋고 그녀보다는 내 쪽이 강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난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야. 그리고 성숙해질 거야. 어른이 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지.
난 지금까지는 그럴 수만 있다면 열일곱, 열어덟인 채로 있고 싶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십대 소년이 아니니까. 난 책임을 느낀다. 아아, 기즈키, 난 너와 함께 있었을 때의 내가 아냐. 난 이미 스무 살이 된 거라구. 그래서 난 계속 살아가기 위한 대가를 치러야만 해. - 「상실의 시대」 중에서
소설이라는 장르에 별관심이 없던 대학 1학년 시절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 :원제 Norwegian wood>의 위 문구를 보면서 나도 주인공처럼 살기로 결심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나의 화두는 “왜 사는가?”이었다. 그런데 위 문구로 인해 나의 화두는 자연스럽게 “어떻게 살 것인가?”로 전환되었다. 그래야할 합리적인 이유, 근거 따위는 없었다. 그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 때까지 나는 내가 “존재의 이유 혹은 그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찾고 있었다고 스스로 믿어왔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나는 이것이 문학의 힘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합리성만이 전부는 아님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거의 다 읽다시피 했고 점차 그의 소설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는 정말 중요한 이유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나에게 있어 문화적 허브역할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실재하는 패션, 음악, 책, 인물, 운동 등 다양한 문화 소재들이 자연스럽게 소개되어 그의 소설을 읽는 동안 다른 문화적 소재에도 관심을 가지게 하는 묘한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2. 하루키와 책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는 사람이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 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듯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 「상실의 시대」 중에서
“나는 본디 빨리 읽는 독서가가 아니다. 시간을 들여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어가는 타입이다. 문장을 즐긴다. 문장을 즐길 수 없으면 도중에 읽는 걸 그만둔다. 다섯 시 조금 전에, 그 소설을 끝까지 읽고 서가에 돌려놓은 다음 소파에 앉아서 눈을 감고, 어젯밤의 일을 어렴풋이 생각한다.” - 「해변의 카프카」 중에서
하루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직장을 잃은 실업자, 가출소년 등 사회적으로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들은 모두 활자중독 혹은 독서광이다. 게다가 그들이 읽는 책은 대부분 고전이라 불릴 만한 소설들인데 그들은 어디서든지 자연스럽게 책을 펼쳐든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카페에 홀로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싶어진다.
하루키가 자신의 소설에서 다른 소설을 언급할 때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이 있다. 그는 그의 소설의 주인공들이 읽는 책에 대해 언급은 하지만 그 내용을 직접 말해주는 것이 아닌, 그 책을 읽어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게끔 글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지금 읽고 있는 하루키의 소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언급된 소설들에 궁금증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루키의 대표적인 소설인 <상실의 시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 관심을 가져보았을 것이고 또한 직접 읽어본 사람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어 5번이나 읽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읽으면서 <상실의 시대>의 나가사와 선배는 왜 <위대한 개츠비>를 3번 읽었다면 자신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곤 했다.
<위대한 개츠비>의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가난한 청년 개츠비와 부유한 집안의 아가씨인 데이지는 서로 사랑했지만 데이지의 집안의 반대로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하고 결국 데이지는 부유한 집안의 청년인 톰 뷰캐넌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개츠비의 유일한 삶의 목표는 데이지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밀주를 판매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력을 키운다. 그래서 그는 막대한 재력가가 되어 데이지가 사는 곳 근처에서 정기적으로 파티를 열어 데이지가 그 파티에 오기만을 기다리고, 결국 그녀와 만나게 된다. 그동안 남편인 톰뷰캐넌의 계속되는 외도에 힘들어하던 데이지는 첫사랑인 개츠비를 만나자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톰 뷰캐넌은 태도를 바꾸어 이 시대의 마지막 도덕의 수호자인양 개츠비와 대립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던 중 데이지와 개츠비가 톰 뷰캐넌의 차를 타고 길을 떠나자 이를 톰 뷰캐넌이 다른 차를 타고 뒤쫓게 되는데, 톰 뷰캐넌의 차가 지나가는 것을 본 톰 뷰캐넌의 정부(情婦)가 그 차 앞으로 뛰어들다 치어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 사고로 실의에 빠져있던 그 정부(情婦)의 남편에게 톰 뷰캐넌은 운전하던 사람은 개츠비라고 말해주고 개츠비도 데이지를 위해 자신이 운전한 것으로 뒤집어쓴다. 결국 개츠비는 그 정부의 남편에게 총을 맞고 죽음에 이른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데이지는 비정하게도 다시 톰 뷰캐넌과 결합을 하고 그 지역을 떠나버린다. 그리고 그 토록 많은 파티를 베풀었던 개츠비의 장례식에는 그 누구하나 찾아오지 않는다. 오로지 화자인 주인공이 개츠비를 그리며 그의 장례식장을 지켜준다.
지금은 어느 정도 <위대한 개츠비>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고, 나가사와 선배가 왜 <위대한 개츠비>를 3번 읽었다면 자신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했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이상이 현실에 부딪혀 깨져버린다 해도 그것을 추구하겠다는 그들의 공감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목숨까지 바쳤던 데이지로부터 배신을 당했지만 개츠비는 불쌍한 개츠비가 아닌 위대한 개츠비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3. 하루키와 음악
“내 생각에는 슈베르트의 음악은, 사물의 본연의 상태에 도전해서 깨지기 위한 음악이라고 할 수 있어. 그것이 로맨티시즘의 본질이고, 슈베르트의 음악은 그런 의미에서 로맨티시즘의 정수지. - 「해변의 카프카」 중에서
“슈베르트는 훈련에 의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이지. 나 역시 처음에 들었을 때는 지루했어. 네 나이라면 그건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인간은 이 세상에서 따분하고 지루하지 않은 것에는 금세 싫증을 느끼게 되고, 싫증을 느끼지 않는 것은 대개 지루한 것이라는 걸. 그런 거야. 내 인생에는 지루해할 여유는 있어도 싫증을 느낄 여유는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두 가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게 보통이지만.” - 「해변의 카프카」 중에서
하루키는 올드팝, 재즈, 클래식 등 다양한 음악을 좋아한다. 그의 집에는 수천 장의 레코드가 구비되어 있다고 할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에서는 마치 배경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중간 중간 실제로 존재하는 음악이 소개되고는 한다.
<상실의 시대> 첫 장면인 독일행 비행기가 착륙하던 순간 흘러나오는 비틀즈의 <노르웨이 숲>, 비 내리는 나오코의 20살 생일에 흘러나오던 빌 에반스의 <왈츠 포 데비>, <해변의 카프카>에서 프린스의 음악을 들으며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장면, <1Q84>에서 아오마메가 타고 있던 혼잡한 수도고속도로의 택시 안에서 흘러나오던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등. 이렇게 소개된 음악을 직접 찾아 들으면서 해당부분을 읽는 것도 하루키를 읽는 또 다른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의 소설에는 종종 등장인물을 통해 하루키가 특정한 음악에 대해 간단한 평가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나에게 그 음악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곤 한다.
예를 들면 그의 소설인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도서관 사서인 오시마 상이 슈베르트의 음악을 소개하면서 슈베르트는 훈련에 의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이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을 통해 나는 음악도 즐기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동안 클래식의 진가를 알지 못했던 것은 클래식 자체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클래식을 듣는 훈련이 부족했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4. 하루키와 운동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 가령 달리면서 '아아, 힘들다! 이젠 안되겠다'라고 생각했다고 치면, '힘들다'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젠 안되겠다'인지 어떤지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하기 나름인 것이다. 이 말은 마라톤이라는 경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간결하게 요약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서
저녁식사 전에 나는 운동을 한다.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쪼르려 앉기, 물구나무서기, 몇 종류의 스트레칭. 기계나 설비가 없는 좁은 장소에서 신체 기능을 유지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체력 단련 메뉴다. 단순하고 따분하기는 하지만, 운동량은 부족하지 않으며 제대로 하기만 하면 확실히 효과가 있다. 나는 체육관 강사한테 이 운동을 배웠다. "이것은 세상에서 제일 고독한 운동이지"하고 그는 설명해 주었다. "이 운동을 가장 열심히 하는 것은 독방에 수감된 죄수들이야" 나는 의식을 집중해서 땀으로 셔츠가 흥건히 젖을 때까지 이 일련의 운동을 몇 차례 반복한다 - 「해변의 카프카」 중에서
하루키는 또한 마라톤 애호가로서 20여 년간 20여 번의 마라톤 완주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의 달리기에 관한 에세이로서 상당히 재미있는 책이다. 아마 이 책을 읽고 나면 누구나 한번쯤 운동화를 신고 신나게 달려보고 싶어질 것이다. 그 밖에 그는 소설 속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기도 하고, 야구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장거리 달리기에 빠져들었고, 웨이트 트레이닝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특히 <해변의 카프카>를 읽으면서, 웨이트 트레이닝에 대한 매력을 강하게 느꼈고 나도 꼭 이 소설의 주인공인 다무라 카프카처럼 웨이트 트레이닝을 배우고 싶다는 욕구가 마음속에 강하게 자리 잡았었다. 그래서 2008년 봄 사시 2차 공부를 위해 서울 신림동에 입성하자마자 헬스클럽부터 등록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코치"였다. 내가 다무라 카프카에게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다름 아닌 '멋진 코치'였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헬스클럽을 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도 '코치'가 있는지 여부였다.
하지만 내가 실제 접한 '코치'들은 대개 남자회원들에게 불친절했고(물론 여자회원들에게는 무척 친절했다) 게다가 뭔가 잘 가르쳐주는 성향의 사람들도 아니었다. 다무라 카프카의 코치들처럼 '어떤 근육이 평소 사용하는 것이고, 어떤 근육이 기구가 아니면 강화할 수 없는 것인지' 따위는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이런 운동은 고독하다'등의 문학적인 이야기를 들려 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투덜투덜대면서 혼자서 기구사용법을 읽어가며 독학으로 운동을 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사법연수원 시절 운좋게도 같은 반에 웨이트 트레이닝을 10년간 해온 연수생이 있어서, 그가 흔쾌히 나의 '코치'가 되어주었다. 그는 트레이닝 첫날부터 "헬스는 고통이야, 고통! 헬스는 뭐라구?"라고 나에게 물어보거나, "헬스는 한계를 넘어설 때부터 운동이 되는거야. 평소에 10개를 해왔다면 11개 째부터 운동이 되는 거라구"라고 하거나, "헬스는 멘탈스포츠야. 눈을 감고 근육에 집중해봐"라고 하여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나에게도 '다무라 카프카처럼, 멋진 코치가 생긴 순간이었다.
5. 하루키를 위한 변명
요즘 사람들의 평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과거 무라카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극과 극이었던 것 같다. 즉 좋아하는 사람은 무척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극도로 싫어했던 것 같다. 과거에 사람들에게 내가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약간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나를 쳐다보고는 했던 기억이 난다. 뭔가 이상한 녀석(?!)이 아닌가 하는 눈빛으로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라카미를 싫어했던 사람들은 그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허무함, 개인주의, 노골적인 성 묘사 등 때문에 그의 소설 혹은 하루키 자체를 싫어했던 것 같다.
물론 하루키는 허무함을 그리고 있지만 그는 그 속에서 유머를 찾는다. 그의 수필의 제목인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처럼.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키득키득 거리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이 개인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그의 소설인 <상실의 시대>를 개인적으로 왕따백서라고 부르곤 하는데, 그 정도로 그는 그의 소설 속에서 사람이 ‘혼자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이토록 멋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솜씨 좋게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극단적 개인주의적 인간상을 그리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어하는 개인이기 때문이다.
한편 성적인 표현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변하고 싶다. 어쩌면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것을 그려 넣은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고.
6. 마치며
예전 모 판사님의 글에서 ‘판사들이 판결이 논리적이라는데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처음 그 글을 보았을 때는 그게 무슨 문제인가 했었으나 지금은 그 말씀에 크게 공감하고 있다.
학교 울타리 안에서는 합리성, 논리성이 강조되어 왔고 나 또한 학창시절에 그러한 것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해 왔던 것 같다. 하지만 30대 이후로는 논리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기반이 너무나도 불안정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논리란 간단히 말하자면 전제로 결론을 뒷받침하는 과정을 말하는데 사실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슬러 올라가보면 결국 최초의 전제의 참∙거짓여부는 인간으로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사방을 벽으로 둘러쳤으나 천장이 뻥 뚫려있는 격인 것이다. 결국 논리만으로 진리(또는 실체진실)에 도달하기 어렵고 그러한 일종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믿음, 가치판단 등이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곳에서야 말로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고, 그러한 상상력은 문학 및 예술을 통해서 길러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상상력을 길러줄 문학. 하루키와 함께 해보시는 것은 어떻겠냐고 권해드리고 싶다.